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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호랑이
선사시대 생활 풍습이 담겨 있는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는 함정에 빠진 호랑이, 새끼를 밴 호랑이 등 총 14마리의 호랑이가 등장한다. 호랑이는 단군신화에도, 전래동화에도 등장한다. 그뿐인가. 한반도 땅 모양을 호랑이에 빗대는가 하면 1988년에는 올림픽 마스코트로도 ‘호돌이’를 사용했다. 한반도는 예부터 ‘호랑이의 나라’였다.
호랑이라고 다 같은 호랑이일까이제 산 속에 더 이상 호랑이가 살지 않는다. 호랑이를 보려면 산이 아니라 동물원으로 가야한다. 서울 근교에서는 과천 서울동물원과 용인에 위치한 삼성에버랜드 동물원이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서울동물원에 있는 호랑이와 삼성에버랜드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는 서로 다른 종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서울동물원 호랑이는 시베리아호랑이(아무르호랑이)로 주로 러시아, 만주에 분포한다. 삼성에버랜드 호랑이는 인도와 방글라데시에 주로 살고 있는 벵골호랑이다. 이들을 포함해서 현재 남아있는 호랑이에는 6가지 아종(subspecies)이 있다.
호랑이의 아종은 크기나 무늬가 제각각이다. 시베리아호랑이는 아종 중에서 덩치가 가장 크고 줄무늬의 가로 폭이 좁다. 수컷의 평균 몸길이는 190~230cm, 평균 몸무게는 227kg이다. 이런 호랑이는 서 있으면 ‘키’가 사람 허리 높이를 훌쩍 넘긴다. 귀와 귀 사이가 30cm, 귀에서부터 코까지 길이도 무려 30cm다. 가장 작은 아종인 발리호랑이 수컷(90~100kg)의 2배가 넘는 덩치다. 이런 외형적인 특성은 지역의 차이와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보통 추운 지역에 사는 호랑이일수록 덩치가 크고 털이 두꺼운 편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몸집이 큰 놈일수록 강하다. 호랑이는 고양이과 동물 중에서 가장 크다(수사자와 암호랑이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 ‘라이거(liger)’ 제외). 삼성에버랜드 사파리에 벵골호랑이가 들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삼성에버랜드에서는 사자와 호랑이를 함께 사육한다. 벵골호랑이는 호랑이 아종 중에서 크기가 중간 정도인 종으로 사자와 적절한 힘의 균형을 이룬다.
황금색 호랑이가 있다?백호는 종종 호랑이의 아종으로 오해를 받는다. 백호는 털 색깔이 눈처럼 희기 때문에 황갈색인 일반 호랑이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하지만 백호는 자연 돌연변이다. 털 색깔을 흰색으로 발현시키는 열성 유전자에 의해 벵골호랑이는 1만 분의 1의 확률로, 시베리아호랑이에게선 10만 분의 1의 확률로 일어난다. 간혹 백호가 ‘백색증(알비노)’이 아닌지 의심하는 사람도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백색증은 멜라닌 세포가 멜라닌을 합성하지 못해 체내에 색소가 감소하는 증세인데, 이런 경우 혈관이 비쳐 보이기 때문에 눈동자가 분홍빛을 띤다. 하지만 백호는 줄무늬가 거무스름하며 눈은 옅은 파랑색, 코는 분홍색이다.
황금색을 띄는 호랑이도 있는데, 이 역시 아종은 아니다. 황금색호랑이는 2010년 기록으로 세계적으로 30여 마리가 생존한 것으로 보고됐다. 1932년 인도 마이소르 파디쉬 지역에서 2마리가 잡힌 이후로 야생 상태에서는 멸종됐고, 남아 있는 것들은 모두 동물원 같은 사육시설에서 보호받고 있다. 황금색 호랑이의 정확한 이름은 ‘금빛 얼룩무늬 호랑이(Golden Tabby Tiger)’다. 이 호랑이는 검은색 줄무늬 대신 금빛을 띠는 줄무늬를 가진다. 털 색깔도 일반 호랑이보다 연하고, 특히 다리 부분이 백호처럼 희다. 황금색 호랑이의 털은 일반 호랑이 털보다 훨씬 두껍다.
호랑이 소리를 들으면 오금이 저리는 이유“어흥~.” 하는 호랑이의 울음소리는 화가 나 적의를 표시하는 소리다. 일각에선 호랑이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어흥’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런 경우는 실제로 거의 없다고 한다. 평소의 호랑이는 ‘크르르릉’ 하고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취취’ 작게 재채기하는 소리를 많이 낸다. ‘크르르릉’ 소리는 일종의 경고다. 사육사가 먹이를 던져 주려고 앞에 서면 최고 우두머리인 호랑이는 낮게 ‘크르르릉’ 소리를 내며 ‘내 먹이에 손대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반대로 ‘취취’ 소리는 상대에게 친근감을 표시할 때 내는 소리다. 사육사가 다가가면 호랑이들은 ‘취취’ 소리를 내며 철창에 털을 비빈다고 한다.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으면 오금이 저린 것은 호랑이가 내는 저주파 소리 때문이라는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동물커뮤니케이션연구소의 동물음향학자인 엘리자베스 폰 무겐탈러 박사는 호랑이 24마리의 소리를 분석해 2000년 음향학회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호랑이 소리에는 사람이 들을 없는 18㎐ 이하의 초저주파도 있다고 발표했다. 저주파 소리는 고주파 소리보다 멀리 전파된다. 야생 상태에서 굉장한 장점이다. 연구팀은 “호랑이 울음소리에 오금이 저리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저주파가 근육을 진동시키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반도 호랑이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한반도에 호랑이가 살기 시작한 시기는 1만 년 전~9000년 전쯤. 마지막 빙하가 물러나고 신석기 시대로 접어드는 무렵이다. 인도차이나 북부와 중국 남부지역에서 처음 발생한 호랑이는 동서양의 무역길인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에 도달했다. 이어 몽골 북쪽의 삼림지역을 거쳐 현재의 러시아 아무르지역과 중국 동북지역에 진출하면서 한반도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수천 년 동안 한반도 호랑이는 사람은 생태적 균형을 이루며 잘 살았다.
그러나 14세기 무렵 조선은 백성의 생명을 보호하고 농경지를 개간한다며 호랑이를 잡는 포호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수가 감소하던 호랑이는 일제강점기 ‘해로운 동물을 몰아낸다’는 해수구제정책에 멸종 위기에 처했다. 밀렵도 성행했다. 일명 ‘호랑이 약’이라고 해서 당시 동양 의학에서는 호랑이가 귀중한 약재였다. 중국에서는 호랑이의 뼈를 이용해 진통제를 만들었고, 베트남에서는 뼈를 류머티즘 약으로 썼다. 호랑이의 가죽은 장식품으로 판매됐다. 결국 호랑이는 1927년 경주 대덕에서 잡힌 이래로 남한에서 종적을 감췄다.
하지만 한국에 야생호랑이를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 수의학과 이항 교수팀은 2012년 한국호랑이와 아무르호랑이가 같은 아종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아무르호랑이는 1940년대 20~30마리까지 줄어 멸종 직전에 몰렸으나 국제적인 보호운동에 힘입어 현재 400여 마리가 남아있다. 이것들이 한반도에 돌아오면 한국에도 호랑이가 복원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