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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영화인사전

신일선

Sin Il-seon , 申一仙

심삼순(申三順)

요약

일제 강점기 조선의 영화배우인 신일선은 본명은 심삼순(申三順)으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녀가 조선의 민중들에게 이름을 널리 알리게 계기는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에 출연하면서이다. 작품은 식민지 시대 최고의 영화로 꼽히는 작품으로, 당대인의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였다. 신일선은 영진(나운규 분)의 어린 여동생으로 등장하여, 일약 스타로 떠올랐으며, 이른바 ‘조선의 애인’으로 불릴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출생
1912년 서울 견지동
사망
1990년
본명
심삼순(申三順)
데뷔
1926년 10월 1일 〈아리랑〉
생애와 이력

신일선 Sin Il-seon 申一仙(1912~1990)

일제 강점기 조선의 영화배우. 신일선은 본명은 심삼순(申三順)으로 서울 견지동 출생이다. 그녀는 1912년 서울 견지동에서 출생했으며, 1921년 동덕여자보통학교(현 동덕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 4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중퇴했다. 그녀는 오빠 신창운의 권유로, 극단에 가입하여 배우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귀여운 용모는 그녀를 사랑받는 배우로 만들었다. 그녀가 활동한 극단으로는 조선예술가극단(朝鮮藝術歌劇團), 반도예술단(신창운 조직), 해동예술단(동반예술단의 변형), 문수성 등을 꼽을 수 있다.(「조선영화계 유일의 화형배우(花形女優) 일문일답 신일선 양과의 문답기」, 『별건곤』(7호))

그녀가 조선예술가극단에 가입하기 위해서 〈메기의 추억〉이라는 노래를 불러 오디션에 합격했고, 1925년 6월 ‘일선(一仙)’이라는 예명으로 처음 무대에 서게 되었다(신일선,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작품 세계

그녀가 조선의 민중들에게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계기는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에 출연하면서이다. 〈아리랑〉은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는데, ‘공안(公安)을 방해할 가사가 있’다는 이유로 노래 〈아리랑〉의 일부가 삭제되는 탄압을 받기도 했을 정도로 저항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였다. 이 작품은 식민지 시대 최고의 영화로 꼽히는 작품으로, 당대인의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였다. 신일선은 영진(나운규 분)의 어린 여동생으로 등장하여, 일약 스타로 떠올랐으며, 이른바 ‘조선의 애인’으로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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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운규의 영화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 복혜숙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복혜숙은 나운규로부터 〈아리랑〉의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신극좌 단원들과의 공연 약속으로 인해, 자기 대신 신일선을 추천했다고 한다. 당시 신일선은 문수성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였는데, 나운규는 직접 함흥까지 찾아와서 신일선을 면접하고 그녀를 ‘영희’ 역으로 캐스팅하였다.

신일선은 캐스팅 배경까지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당시에는 각광받는 여배우로 떠올랐다. 특히 그녀의 데뷔작에서 미치광이 오빠를 둔 여동생 역을 연기하여, 가련한 어린 누이의 이미지로 조선 관중들에게 각인되었다. 그녀의 역할은 지주의 마름(주인규 분)에 의해 육체적으로 침탈당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일제에 의해 강점당한 조선의 처지를 상징하고 있어, 당시 관객들에게는 신일선의 연약한 모습이 조선의 비참한 상황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그녀에 대한 관심은 곧 조선 처지에 대한 비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조선 민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된 신일선은 이후 조선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평가되며, 1926~1927년에 무려 5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아리랑〉 다음 작품이 이경손 감독의 〈봉황의 면류관〉이었다. 이 영화는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신일선 자신의 평가로는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작품으로 꼽고 있다. 신일선은 주인공 소년(정기탁 분)을 사이에 두고, 언니와 경쟁하는 여인 역할로 출연했다.

〈괴인의 정체〉는 한국 최초의 탐정 영화로 꼽히는 작품으로 신일선은 ‘최영옥’으로 출연하였다. 이 작품의 출연진 중에서 신일선만 유일하게 전문 배우였는데, 신일선은 훗날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괴인의 정체〉에 함께 “출연하는 이들이 짝이 안 맛고요. 그런데다가 그 때에 내가 맛흔 역이 내게는 맛지도 안는 딴 청의 것이닛가 실흔 것을 억지로 박혓지요.”

1927년에 개봉한 〈들쥐〉와 〈금붕어〉에도 신일선은 출연하였다. 두 작품 모두 나운규가 감독을 맡고 주연을 맡은 영화여서, 〈아리랑〉 이후의 인연이 이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금붕어〉에서 신일선의 출연은 미스 캐스팅으로 평가되었다. 신일선에게 알맞은 역이 아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조선키네마 특작 〈금붕어〉를 보고」, 『동아일보』).

1927년에 그녀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작품은 조일재 지휘, 심훈 연출의 〈먼동이 틀 때〉였다. 이 작품은 처음에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명으로 소개되었는데(『동아일보』, 1927년 8월 13일), 1927년 10월 26일에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1920년대 신일선이 출연한 마지막 영화였다.

이후 신일선은 전남 부호 양승환과 결혼하여 은막을 떠났다. 신일선의 갑작스러운 퇴장은 그녀에게 열광했던 조선 관객들의 아쉬움을 샀다. 더욱 아쉬운 것은 그녀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영위해야 했고, 그것도 7년 만에 이혼하고 은막으로 복귀한 것이다. 그녀는 두 아들을 낳았지만, 정식 부인이 되지 못했고, 양승환과의 결혼 생활을 정리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1933년 연예계로 복귀했다. 그녀는 음반 가수로 활동을 재개했고, 안종화 감독의 〈청춘의 십자로〉와 〈은하에 흐르는 정열〉을 통해 은막에 복귀했으나, 예전과 같은 반응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청춘의 십자로〉는 사랑하는 여인과 여동생을 잃은 농촌 총각의 복수담을 다룬 영화이고, 〈은하에 흐르는 정열〉 역시 통속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작품으로 매일 같은 시간대에 만나게 되면서 서로에 대한 감정을 쌓아가는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아리랑〉에서 보여주었던 심화된 문제의식이나 사회역사적인 표상을 찾기 어려웠다.

본문 이미지 청춘의 십자로

청춘의 십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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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선은 〈아리랑〉의 완결편에 해당하는 〈아리랑 3편〉에 출연하였다. 신일선과 마찬가지로 재기의 의욕에 불타고 있던 나운규는 〈아리랑 제 3편〉에서 동생 영희 역으로 ‘돌아온 배우’ 신일선을 기용했다. 신일선은 ‘미친 오빠 최영진’을 돌보기 위해서, 오빠의 친구 김 선생(윤봉춘 분)의 도움을 받아 삯바느질로 연명하지만, 그녀의 미모에 반해 겁탈을 시도하는 수리조합 측량기사(태준, 전택이 분)로 인해 결국에는 죽음을 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에 분노한 영진은 ‘태준’을 살해하고, 동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죽음 앞에 할 말을 읽는 내용의 영화였다(『매일신보』, 1936년 2월 7일). 그러나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하는 의욕에도 불구하고, 기술 부족으로 인해 이 영화는 음성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한계에 직면해야 했다. 이창용의 개입하여 간신히 관람할 수 있을 정도로 수습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이 시점에 되면 조선 영화 관객들이 발성영화의 허실을 탐지하게 되므로, 상대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졌던 〈아리랑 제 3편〉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영화사적 평가

신일선은 이 작품 이후로 은막에서 은퇴하였고, 은퇴 직후에는 무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은막 은퇴 이후 불우한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고, 어려운 인생행로를 밟아나가야 했다. 나운규 20주년 기념으로 김소동 감독이 〈아리랑〉을 리바이벌 할 때, 그녀는 단역으로 특별 출연하였다. 1966년에는 마포에서 술집을 경영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지경에 처했고, 1980년대에는 지병으로 쓰러져 신체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녀는 1990년에 사망했다.

신일선은 1920년대 배우 중에서도 대중의 사랑을 유독 많이 받은 배우였다. 그녀의 별명은 ‘미쓰 조선’이었으며, 청순하고 가련한 이미지로 조선 관객의 애처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여배우였다. 특히 〈아리랑〉에서 영희 역할은 조선민중의 마음에 크게 호소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그녀의 인생은 내리막길로 들어섰고, 갑작스러운 결혼과 이혼 이후에는 예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그녀의 말년은 조용했으며 또 불우했다. 이것은 많은 여배우들이 걸어야 했던 길이기도 했다.

작품 목록

〈아리랑〉(Arirang, 조선, 1926, 출연)
〈봉황의 면류관〉(The Royal Crown of a Pheonix(Bonghwang-ui myeonlyugwan), 조선, 1926년 11월, 출연)
〈괴인의 정체〉(The Natural Shape of a Mystery Man(Goe-in-ui jeongche), 조선, 1927년 2월, 출연)
〈들쥐〉(Deuljwi, 조선, 1927년 4월, 출연)
〈금붕어〉(The Golden Fish(Geumbung-eo), 조선, 1927년 7월, 출연)
〈먼동이 틀 때〉(When the Sun Rises(Meondong-i teul ttae), 조선, 1927년 10월, 출연)
〈청춘의 십자로〉(Turning point of the youngsters(Cheongchun-ui sibjalo), 조선, 1934, 출연)
〈은하에 흐르는 정열〉(Passion in the Universe(Eunha-e heuleuneun jeong-yeol), 조선, 1935, 출연)
〈아리랑 3편〉(Arirang(part 3), 조선, 1936, 출연)
〈아리랑〉(김소동 감독)(Arirang, 한국, 1957,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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