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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립 카미도프
Tolib Khamidov탈립 카미도프는 타지키스탄의 영화감독이다. 마이람 유수포바, 바코 사디코프 등과 더불어 1980년대 말 타지키스탄 영화계에 등장한 신예로 주목받았고, 타지키스탄 영화산업이 붕괴된 상황에서 <존재>(Presence, 1995)를 완성하는 저력을 보였다.
- 출생
- 1956년, 타지키스탄 투르순자데(Tursunzade)
- 본명
- 탈립 카미도프(Tolib Khamidov)
- 데뷔
- <욕망의 식별>(Identification of Desire, 1991)
탈립 카미도프는 1956년 타지키스탄 투르순자데(Tursunzade)에서 태어났다. 1977년 투르순자데 예술대학 연출학과를 졸업했으며, 이후 모스크바로 건너가 VGIK에서 연출을 전공했다. 타지키스탄으로 돌아온 그는 1983년부터 4년간 타지크필름(Tajikfilm) 스튜디오에서 기록영화 감독으로 일했고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1989년까지 시나리오작가 및 연출가 최고과정(VKSR)을 이수했다.
작품 세계마이람 유수포바, 바코 사디코프 등과 더불어 1980년대 말 타지키스탄 영화계에 등장한 신예로 평가받는 카미도프는 기록영화 <인생은 그렇다>(Such Is Life, 1989)로 암스테르담영화제에서 수상했고, 사업을 위해 친구의 어머니를 고용한 젊은 남자 이야기를 그린 <욕망의 식별>(Identification of Desire, 1991)을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당시 타지키스탄은 사회적 혼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소비에트연방 체제의 붕괴와 타지키스탄의 독립, 그리고 독립 직후 시작된 내전으로 수도 두샨베에서는 매일같이 전투가 벌어졌다. 소연방 시절 타지키스탄 영화계를 이끌던 타지크필름 스튜디오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었고, 이에 많은 영화인들이 타지키스탄을 떠났다. 이런 와중에 카미도프는 1995년 <존재>(Presence)를 완성했다.
<존재>는 확정된 시나리오 없이 제작을 시작해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 촬영을 위한 생필름도 없었고 촬영감독도 특정인으로 정해지지 않았지만 카미도프에게 우호적인 촬영감독들이 자발적으로 모였고 각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필름을 모아 촬영되었다. 배우를 비롯한 전 스텝도 무보수로 각자 개인장비를 들여 제작에 참여한 이 영화는 당시 타지키스탄 영화계의 상황을 고려할 때 완성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존재>는 타지키스탄 내전을 배경으로 세 친구가 전쟁의 비극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이다. 직접적인 총격신이 등장하지 않는 대신에 카미도프는 여러 기록영상으로 전쟁의 야만성을 드러냈다. 전체적으로는 기록영화 스타일로 만들어졌으나 죽은 소를 먹는 들개, 땅에 생긴 균열과 그 균열을 향해 나체로 눕는 사람 등 상징적인 장면으로 전쟁의 비극을 표현했다. 베를린 영화제의 포럼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이 영화는 내전을 겪는 젊은이들이 자포자기하는 분위기와 그 와중에도 희망을 찾아보려는 등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한 영화라 평가받았다. 사둘로 라시모프(타지키스탄 디도르영화제 집행위원장)는 이 영화를 내전기를 포착한 주요작으로 손꼽으면서 전쟁, 인간존재, 종교적 회의를 보여준 영화라고 평가했다. <존재> 이후 카미도프는 더 이상 타지키스탄에서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결국 그도 2000년 러시아로 이주했고, 방송국에 입사해 TV시리즈물을 연출했다.
작품 목록<인생은 그렇다>(Such Is Life, 소비에트연방, 1989, 다큐멘터리)
<욕망의 식별>(Identification of Desire, 타지키스탄, 1991)
<정교회의 축제>(Pravoslauniye prazdniki, 타지키스탄, 1992, 다큐멘터리)
<더 배트>(Yarasa, The Bat, 아제르바이잔, 1995, 배우)
<존재>(Presence, 타지키스탄, 1995, 감독/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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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잊혀진 중앙아시아의 뉴웨이브영화』, 본북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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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백과 이세돌
한국의 프로 바둑 기사. 1995년 입단해 국제 기전에서 18번 우승하는 등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도 출신이다. 1983년 3월 2일 출생으로 1995년 입단해 프로가 되었다. 당시 나이는 12세로 조훈현 9단(9세 입단)와 이창호 9단(11세 입단)에 이어 한국 프로기사 최연소 입단 3위의 기록이다. 이세돌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2000년부터다. 1999년 3단이 된 이세돌은 2000년 32연승을 거두며 ‘불패소년’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세돌은 승단대회를 치르지 않은 상태로 여러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2002년에는 세계대회인 후지쓰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하면서 그해 바둑문화상 최우수기사상을 수상했다. 2003년 한국기원이 특별 승단 제도를 도입하면서 이세돌은 빠른 속도로 승단했다. 특별 승단은 프로기사의 우승 실적에 따라 단위를 올려주는 방식이다. 세계대회 우승 시에는 3단, 준우승은 1단이 올라가며 국내 1~3위 기전 우승자는 2단, 국내 4위 이하 기전에서 우승할 경우 1단씩 올라간다. 이전까지는 대회 우승 실적과 관계없이 별도로 진행된 승단대회를 -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로 루이 16세의 왕비이다. 프랑스 궁정에서 사치의 대명사로 불리며 시민들의 분노를 사서 결국 프랑스 혁명을 촉발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혁명군에게 붙잡힌 후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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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백과 김형석
철학자. 평남 대동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대학 예과와 철학과에서 공부했다. 중학교 교사로 생활하다가 1954년 연세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31년간 재직했다. 김태길·안병욱과 함께 한국의 3대 철학자로 일컬어진다. 주요 저서로는 <고독이라는 병>·<영원과 사랑의 대화>가 있으며, 2016년에는 <백년을 살아보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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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백과 김대중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하에서 납치·테러·사형선고·투옥·망명·가택연금 등의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끝까지 맞서 민주화운동을 강력히 전개함으로써 대중적인 카리스마를 얻었으며 세계적으로는 한국의 인권투사로 널리 알려졌다. '인동초',·'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4차례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뒤 자신의 지론인 남북화해 정책을 꾸준히 펼쳐 대외적 명성을 높였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화와 인권, 남북화해 정책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