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 사전 본문
이건명
李健命조선 후기의 문신.
- 출생
- 1663(현종 4)
- 사망
- 1722(경종 2)
- 국적
- 조선, 한국
경종대의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할아버지는 영의정 경여이며, 아버지는 지돈녕부사 민서(敏叙)이다. 1686년(숙종 12) 춘당대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수찬·교리·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1697년 응교로 있을 때 시폐(時弊)를 지적하고 제왕이 취해야 할 도리 및 경세·이민(理民) 방책과 병제·양역(良役)·전정(田政) 등에 대해 건의한 〈진계소 陳戒疏〉를 올렸다.
169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우승지·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이조·형조·호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1717년 숙종이 그의 사촌형인 이이명(李頤命)을 불러 세자교체문제를 논의한 정유독대(丁酉獨對)가 있은 후 우의정에 올랐다. 1720년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한 후 좌의정에 올라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의 영수들과 함께 경종이 병이 많고 자식이 없으니 하루 속히 왕위계승자를 정할 것을 건의했다.
이 주장이 관철되어 1721년(경종 1) 8월 연잉군(延礽君 : 영조)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자,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로 청나라에 갔다. 그러나 그가 청에 간 사이 경종이 소론을 비호하는 태도를 취하자 김일경(金一鏡)을 중심으로 한 소론 과격파는, 세제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趙聖復)과, 청정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4대신이 모역한다고 소를 올렸다.
이 일로 소론이 정권을 잡았고, 1722년 귀국한 그는 청나라에서 세제책봉의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있는 것처럼 발설했다는 죄로 나로도(那老島)에 유배된 후, 소론의 맹렬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죽었다(→ 신임사화). 1724년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잡자 신원(伸寃)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저서에 〈한포재집〉이 있다. 과천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 서하사(西河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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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전 태조
조선의 역사는 고려의 무장 이성계(李成桂)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의 왕족과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웠다.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복위 4)에 화령부(和寧府, 함경도 영흥)에서 이자춘(李子春)과 최한기(崔閑奇)의 딸인 영흥 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중결(中潔), 호는 송헌(松軒)이고, 본관은 전주로 시조인 이한(李翰)의 21대손이다. 무신의 난 때 이성계의 6대조인 이린(李璘)이 형 이의방(李義方)과 함께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의방이 정중부(鄭仲夫)에게 제거되자 이린 역시 함경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린의 아들 이양무(李陽茂, 이성계의 5대조)도 실세(失勢)해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이양무의 아들이자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 대에 이르러서는 고향인 전주에서 농민반란을 주동했다는 혐의를 받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안사는 1231년(고려 고종 18) 무렵에 일족을 거느리고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 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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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정조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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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인물 열전 효명세자
조선 제 23대왕 순조의 아들로 19세기 초 안동 김씨 세도정권에 맞서 개혁을 추진한 인물. 안동 김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조선의 현실은 암울하기 짝이 없었고 양반들의 도덕성은 미로에 갇혔고 관리들의 탐학이 극에 달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연재해와 사회불안이 겹치면서 백성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유랑자가 되었다. 망국의 징조였다. 그런 상황에서 무기력한 국왕을 대신해 정사를 도맡은 효명세자는 정조시대의 영광을 꿈꾸며 다양한 방법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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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태종
태종은 조선전기 제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400~1418년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조선 건국과정에서 결정적인 고비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선 인물이다. 건국 후 신진개혁세력과 갈등을 겪었지만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여 국권을 장악하고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육조를 직접 관할하면서 왕 중심의 정치를 펼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공신과 외척을 무더기로 제거했다. 광범위한 분야의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이룩함으로써 세종 성세의 토대를 닦았다. 능호는 헌릉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