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 사전 본문
페이호오 이 몬테네그로
Benito Jerónimo Feijóo y Montenegro스페인의 교사·평론가.
- 출생
- 1676. 10. 8, 스페인 카스데미로
- 사망
- 1764. 9. 26, 오비에도
- 국적
- 스페인
페이호오 이 몬테네그로(Benito Jerónimo Feijóo y Montenegro)
ⓒ Juan Bernabé Palomino/wikipedia | Public Domain
18세기 스페인의 대표적인 명문가이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사였던 그는 오비에도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다. 그의 평론은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고귀한 이성을 공표하고 널리 전파했다. 그의 주요저서 2권인 〈세계 희곡 평론 Teatro critico universal〉(1726~39)·〈진기하고 박학한 편지들 Cartas eruditasy curiosas〉(1742~60)은 자연과학과 교육학·법학·의학·문헌학, 그리고 대중 신앙 혹은 미신에 이르기까지 백과사전 같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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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세종
우리나라 사람치고 세종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초상화를 보노라면 누구나 세종이 미남형의 얼굴에다 인자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50)은 33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바쁜 정무에 무척 시달렸다. 새벽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 일찍 일어나 정무를 보았고 밤에는 학문까지 익혔으니 심신이 무척 고달팠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30여 년을 하루같이 견뎌 냈다. 그래서인지 쉰 살이 넘고부터는 잔병이 잦았다. 세종은 죽기 직전까지 정무를 보았는데, 죽기 이틀 전에는 일대 대사령을 내렸다. 1450년 2월 15일 이전의 모반대역죄와 악질적인 살인죄나 강도죄 이외에는 모두 사면한다는 유지를 내린 것이다. 세종이 죽음을 앞두고 대사면을 내린 사례는 대단히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은 죽기 직전에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집에 있는 동별궁으로 거처를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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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인물 열전 정난정
조선 중기 척신 윤원형의 첩. 천민이었으나 타고난 미모와 재기를 발휘해 정1품 정경부인에 올랐으며 철의 여인 문정왕후를 보필하고 보우대사를 막후지원하면서 불교 중흥과 신분타파를 시도하여 강고한 유교 사회에 일대 변혁을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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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순신
이순신은 조선시대 정읍현감, 진도군수,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1545년(명종 즉위)에 태어나 1598년(선조 31)에 사망했다.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자 왜의 침략에 대비해 전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했다. 임진왜란이 나자 옥포·노량·당포·당항포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한산도와 부산포에서도 적들을 격파하고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조정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죄로 잡혀가 문초를 당했다. 정유재란에서 원균이 대패하자 다시 기용되어 조선 수군을 재건하고 적선을 추격하다 유탄을 맞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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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백과 이순신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해전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승리로 이끈 조선의 명장.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공으로 양반가에서 태어나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해 1576년 봄 무과에 급제했다.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된 후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여 거북선을 건조하고 군사를 조련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옥포 앞바다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한산도대첩에서 적선을 크게 격퇴하여 왜군의 전의를 상실시켰다. 1595년 왜군의 간계와 조정의 모함으로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으나 곧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했고, 13척의 배로 300여 척의 왜군을 격파한 명량대첩을 이끌어 왜군의 서해 진출을 저지했다. 마지막 전투였던 11월 노량해전에서 왼쪽 가슴에 탄환을 맞아 전사했다. 진중에서 기록한 <난중일기>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