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 사전 본문
수표교
水標橋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이다. 길이 27.5m, 너비 7.5m, 높이 4m인 수표교는 1406년 인공으로 만든 청계천 위에 가설된 다리 중 하나이다. 청계천에 수표교가 처음 세워진 것은 1441년인데, 이때는 나무로 된 것이었고 현존하는 것은 후대에 보수한 것이다. 다리의 기둥은 2단으로 쌓은 4각형의 큰 석재로 되어 있다. 기둥 위에 긴 휘대를 걸치고 천판석을 깔아 다리의 바닥을 만들었으며, 천판석 사이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지주석을 세웠다. 지주석 중간에는 6각형으로 깎아 난간석을 끼웠고, 난간석 중앙에는 받침돌을 놓아 견고하게 받치도록 했다. 이 다리는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 공원 입구로 옮겨졌다. 물속에 있던 수표석(보물 제838호)은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서 보존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길이 27.5m, 너비 7.5m, 높이 4m.
이 다리는 1406년(태종 6) 인공으로 만든 개천(청계천) 위에 가설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청계천에 수표가 처음 세워진 것은 1441년(세종 23)인데, 이때는 나무로 된 것이었으며, 현존하는 것은 후대에 보수한 것이다.
이 다리의 원래 명칭은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 경도 개천조에 "수표교는 장통교 동쪽에 있는데 수구에 자[尺]과 촌(寸)의 눈금이 새겨진 석주가 있어 수량의 가감을 알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다리 옆에 수표가 세워진 다음부터 수표교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다리의 기둥은 2단으로 쌓은 4각형의 큰 석재로 되어 있는데 아래의 것은 다듬지 않은 것이고, 그 위의 것은 모를 죽여 다듬은 것이다. 기둥 위에 긴 휘대를 걸치고 천판석을 깔아 다리의 바닥을 만들었으며, 천판석 사이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지주석을 세웠다. 지주석 중간에는 6각형으로 깎아 난간석을 끼웠고, 난간석 중앙에는 받침돌을 놓아 견고하게 받치도록 했다. 1760년(영조 36) 수리할 때 다시 다리 옆에 눈금을 새긴 수표를 세우는 한편, 다리의 교각에 '경진지평'이라는 수준을 새겼다.
원래 이 다리는 청계천 위에 놓여 있었는데,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 공원 입구로 옮겨졌다. 물 속에 있던 수표석(보물 제838호)도 함께 장충단 공원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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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치고 세종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초상화를 보노라면 누구나 세종이 미남형의 얼굴에다 인자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50)은 33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바쁜 정무에 무척 시달렸다. 새벽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 일찍 일어나 정무를 보았고 밤에는 학문까지 익혔으니 심신이 무척 고달팠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30여 년을 하루같이 견뎌 냈다. 그래서인지 쉰 살이 넘고부터는 잔병이 잦았다. 세종은 죽기 직전까지 정무를 보았는데, 죽기 이틀 전에는 일대 대사령을 내렸다. 1450년 2월 15일 이전의 모반대역죄와 악질적인 살인죄나 강도죄 이외에는 모두 사면한다는 유지를 내린 것이다. 세종이 죽음을 앞두고 대사면을 내린 사례는 대단히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은 죽기 직전에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집에 있는 동별궁으로 거처를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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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인물 열전 정난정
조선 중기 척신 윤원형의 첩. 천민이었으나 타고난 미모와 재기를 발휘해 정1품 정경부인에 올랐으며 철의 여인 문정왕후를 보필하고 보우대사를 막후지원하면서 불교 중흥과 신분타파를 시도하여 강고한 유교 사회에 일대 변혁을 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