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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
水標조선시대에 한강의 수위를 측정하던 기구.
보물 제838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 1441년(세종 23) 가뭄과 홍수가 겹쳐 많은 피해를 당하자 정확한 강우량을 측정할 필요성이 커지면서 측우기를 고안하고 아울러 수표를 발명하여 설치했다. 수표는 서운관에 있었던 학자들의 공동연구에 의해 창안되고 호조에서 주관하여 측정했던 장치이다. 〈세조실록〉에는 수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수표 수표, 조선시대에 한강의 수위를 측정하던 기구, 보물 제838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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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전교(馬前橋 : 지금의 청계천 수표교 부근) 서쪽 물속에 넓은 돌을 놓고 그 위를 파서 부석(趺石)을 세운 다음 그 가운데에 네모난 나무 기둥을 끼워 쇠갈고리로 부석과 함께 고정시켰다. 나무기둥에 자[尺]·촌(寸)·푼의 눈금을 새겨서 본조의 낭청이 빗물의 깊고 얕은 치수를 살펴 보고하게 했다. 또 한강변의 암석 위에 자·촌·푼의 눈금을 새긴 표를 세워 도승이 물의 깊이를 재서 본조에 알려 보고하도록 했다." 이와 같이 수표는 1441년에 처음으로 서울의 중심부를 흐르는 청계천의 반목재 수표와 한강변의 바위에 눈금을 새긴 표석으로 각각 설치되었다.
그러나 반목재인 청계천의 수표는 부식되기 쉬웠으므로 곧 석재로 개량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수표석(水標石)이 서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성종 때까지는 석재로 개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 수표는 길이가 약 3m, 너비가 약 20㎝의 화강석으로 된 6각기둥 모양의 석주이다.
석주에는 양면에 자단위까지 표시한 것으로 1~10자가 새겨져 있다. 특히 3자·6자·9자의 눈금 위에는 ○표 안에 강우량의 정도를 헤아리는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 등의 글자가 있다. 즉 6자 안팎의 수위가 보통 수위(平水)인데, 9자 이상이 되면 위험하다고 알리는 것이다. 이것은 세종 때 촌·푼의 단위까지 측정했던 것에 비하면 정확도가 떨어지지만 위험수위를 표시했다는 점이 새롭다.
오늘날에도 한강홍수통제소에서는 수표에 의한 수위측정의 전통을 계승하여 한강인도교에서 수위를 측정·관리하고 있다. 현존하는 수표의 확실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다. 마전교에 있던 이 수표는 1960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장충단 공원으로 수표교와 함께 옮겨져 보존되어오다가, 1973년 10월에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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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전 명종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명종은 1534년(중종 29)에 중종과 셋째 부인인 문정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종의 이복동생으로, 출생과 함께 경원군(慶源君)에 봉해지고 인종이 즉위한 1544년(인종 1)에 경원대군(慶源大君)에 봉해졌다. 이름은 환(峘), 자는 대양(對陽)이다. 중종의 첫 번째 계비이자 인종의 모후인 장경왕후 윤씨는 인종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그 후 중종의 두 번째 계비로 궁에 들어온 문정왕후 윤씨는 세자인 인종을 친아들처럼 대하고 인종 역시 문정왕후에 대한 효성이 극진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중종의 둘째 아들인 경원군을 낳은 후로 태도가 돌변했다. 경원군은 자랄수록 총명하고 의젓해졌다. 게다가 세자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때부터 문정왕후와 그의 오빠 윤원로, 동생 윤원형 등의 소윤 일파는 왕의 자리를 탐내기 시작했다. 이는 세자 비호 세력인 대윤과의 정치적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중종이 죽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윤과 소윤의 정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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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인물 열전 사도세자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를 천붕(天崩), ‘하늘이 무너진다.’고 한다. 반대로 자식이 먼저 죽으면 참척(慘慽), ‘참혹한 슬픔’이라고 한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을 잃고 애간장이 끊어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조선 왕실에서는 그런 고통스러운 슬픔을 스스로 실행한 임금이 있다. 조선의 최장수 임금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인 임오화변이 바로 그것이다. 한데 이 비극적인 사건 이후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은 영조는 죽은 아들에게 ‘사도(思悼)’, 즉 ‘애달프게 생각한다.’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곤 손자 정조에게 ‘금등(金縢)’이라는 친필 비밀문서를 주어 세자가 자신을 위해 스스로 죄를 입었다고 자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해지는 기록에는 세자가 좁은 뒤주 속에 갇혀 허기와 기갈에 신음하던 여드레 동안 이 비정한 아버지가 어떤 마음의 고통을 느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세자의 비행을 신고한 생모 영빈 이씨의 불가피한 상황과 아버지의 냉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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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정도전
정도전(鄭道傳, 1342~98) 하면 흔히 반란을 일으키거나 역적 노릇을 한 사람쯤으로 알고 있다. 방원(芳遠, 뒤의 태종)이 아우로부터 왕의 자리를 빼앗는 과정에서 장애인물인 정도전을 제거하고 나서 그에게 온갖 혐의를 덮어씌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도전을 아주 막돼먹은 인물로 역사에 기록했던 것이다. 또 한편, 조선조 건국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정도전은 두 임금을 섬긴 변절자로 낙인 찍으면서 자기들 손으로 죽인 정몽주는 충신으로 내세웠다. 이런 이율배반의 논리가 어떻게 성립될 수 있었을까? 선진유학(先秦儒學)에서 원래 ‘충’이란 정직 · 성실을 뜻한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충’이란 한 임금 또는 한 왕조만을 섬기는 것으로 그 가치기준이 달라졌다. 그리하여 국가의 개혁이나 민족적 과업을 수행하는 일보다 좁은 의미의 ‘충’을 기리고 강조하는 풍조로 흘러갔다. 앞으로 왕조나 한 임금만을 위해 절개를 지키고 목숨을 바치라는, 지극히 공리적인 통치철학의 한 방편으로 이용하려던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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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전 영조
영조는 1694년(숙종 20) 9월 13일에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숙종에게는 둘째 아들이고, 경종에게는 이복동생이다. 6세에 연잉군으로 봉해지고, 경종 즉위년에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휘(諱)는 금(昑)이고, 자(字)는 광숙(光叔)이다. 부왕 숙종은 1717년(숙종 43) 7월 19일 노론의 이이명과 독대하여(정유독대) 노론과 모종의 정치적 결탁을 단행했다. 숙종은 세자 교체를 염두에 두고 노론에게 연잉군과 또 다른 아들인 명빈 박씨 소생의 연령군을 부탁했다. 숙종은 사실 연잉군보다는 연령군을 더욱 총애했다. 그러나 연령군이 숙종이 죽기 직전에 먼저 죽으면서 노론은 연잉군을 숙종의 후계로 삼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숙종이 죽을 때까지 세자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리청정을 하던 경종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경종의 즉위와 함께 노론의 연잉군 옹립 계획도 구체화되었다.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라고 경종을 압박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후사가 없었던 경종은 연잉군의 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