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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술사

韓國技術史
요약

한국기술에 관한 발달사.

개요

한국의 고대 기술은 중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인은 중국의 기술을 언제나 한국적인 것으로 변형하고 개량하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더욱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해 많은 창조적 발견과 발명품을 만들었다.

선사시대의 한국기술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많은 고고학적 유물들이 발견됨으로써 이 땅에도 석기시대 이래로 각종 석기와 토기가 제작되고 원시농경이 행해졌다는 것 등이 밝혀지고 있다. 한편 중국기술의 가장 결정적인 첫 영향은 BC 108년에 한(漢)에 의해 낙랑군(樂浪郡)이 설치되면서 들어온 중국 금속문화의 직접적·집중적인 공급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것은 중국의 철기와 청동기술을 한반도 전역에 전파시켰고 또한 여러 가지 새로운 기술적 발전을 자극시켰다.

삼국시대

낙랑을 통한 중국기술의 영향은 고구려의 고분, 백제와 신라의 순금공예기술 등 삼국 모두에 영향을 주었지만, 삼국 모두는 각각 그들의 독특한 양식의 분묘와 공예품을 만들었다.

실례로 경주의 고분과 공주의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허리에 차는 과대(帶)에 매단 금은의 수식(垂飾)의 형식은 한국에서 발달한 독특한 것이었다. 또한 일본 나라 현[奈良縣]의 이시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존되어 있는 칠지도(七支刀)는 백제 금속공예 기술의 뛰어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의 이러한 창조적 기술의 발전은 신라에서 첨성대석굴암, 아름다운 금속공예품과 청동범종(靑銅梵鐘)으로 나타났다.

첨성대의 용도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다양한 설명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첨성대가 천문관측대라는 것과 제단(祭壇)이라는 것이 있다. 또한 신라 기술자들은 석굴암이라는 훌륭한 건조물을 남겼는데, 그것은 기묘한 구조와 우아한 조각 및 건축기술의 비범함으로 한국 고대 건축기술의 정화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용뉴(龍)라는 신라 특유의 공명용 음관(音管)을 갖고 있는 범종은 형태가 아름답고 소리가 청아하며 길게 트인 은은한 여운으로 심금을 울리는데, 신라 공장(工匠)의 합금 주조기술의 소산이다. 또한 1966년에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서 한국 고대의 인쇄기술이 세계에서 가장 앞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뛰어난 삼국의 문화와 기술은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의 고대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고려시대

고려의 기술은 신라기술의 전통을 바탕으로 중국 송대(宋代) 문화의 영향과 자극을 받아 이루어졌다.

고려시대 기술의 발전을 대표하는 것은 목판인쇄의 발전, 금속활자 인쇄기술의 발명과 고려청자이다. 고려의 목판인쇄는 팔만대장경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불력(佛力)으로 거란과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던 종교적인 기원에서 시작되고 발전되었다. 그런데 목판 인쇄술로 여러 종류의 책을 인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판목(板木)과 시간 및 노동을 필요로 했다. 고려의 장인들은 이 문제를 금속 인쇄기술의 발명으로 해결했다.

그들의 기술수준은 금속활자의 주조에 필요한 모래 주형(鑄型)이나 금속활자에 적합한 유성(油性) 먹과 질이 좋은 종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 고려청자는 송의 자기의 영향을 받아서 발달한 것이지만, 고려의 자기 제조기술은 송의 기술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려의 공장(工匠)들은 그때까지 금속공예품에만 사용되었던 상감법(象嵌法)을 자기에 응용해 자기 제조기술의 새로운 경지를 여는 독특한 기술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조선시대 전기

한국인들이 가진 창조적 기술의 성과는 조선 초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인쇄기술은 조선 전기에 대표적으로 발달한 기술이었다. 태종(太宗)은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계미청동활자(癸未靑銅活字)의 주조를 강행했는데, 그것은 비록 고려시대의 목판본보다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세종(世宗)에게 계승되어 조선의 활판 인쇄기술의 커다란 발전을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500여 년 간 25회에 달하는 금속활자의 주조가 있었으며, 조선의 인쇄기술은 중국과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세종대에 나온 금속활자본은 당시 어느 지역의 인쇄본보다도 깨끗한 것으로 조선의 인쇄기술의 수준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인쇄기술 이외에도 세종대에는 많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우량계(雨量計)를 들 수 있다. 1441(세종 23)~42년에 측우기(測雨器)와 수표(水標)라는 강우량 측정기가 발명되어 강우량의 수량적 측정법이 완성되었다.

땅속에 스며든 빗물의 깊이를 재던 그때까지의 부정확한 측정법의 불합리성을 개량해 빗물을 일정한 용기에 받아서 측정하고 그것을 통계적으로 집계해 농업 등에 이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우량계의 발명은 강우시기가 7~8월에 집중하고 있는 한국의 자연조건을 통계적으로 파악해 그것을 극복하려고 애쓴 결과로서 조선시대 기술이 가진 과학성을 보여준다.

세종대에는 새로운 천문대도 설립되었다. 경복궁에 세워진 천문대에는 간의, 수운혼천의(水運渾天儀), 혼상(渾象)·규표(圭表)와 같은 관측기구, 방위표시계인 정방안(正方案), 각종 해시계, 자동시보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천상(天象) 시계인 옥루(玉漏)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7년이나 걸려서 완성한 이들 천문 관측기계들을 통해 당시 기계제조기술뿐만 아니라 천문 관측기술의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자기 제조기술에 있어 고려청자의 기술은 조선에 이르러 독특한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로 이어졌다.

청화백자(靑華白磁)는 세종대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수입되어 15세기 중엽부터는 조선에서도 만들 수 있게 된 자기인데, 그 기형(器形)과 청화문양의 주제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조선 백자는 기술적으로 15세기 전반 이후에 질적·양적으로 중국의 자기에 견줄 수 있었다. 화포나 거북선도 조선시대 기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화포는 중국의 영향에 의해 고려말부터 실용화되었는데, 세종대에 이르러 중국 양식에서 완전히 탈피해 조선식으로 규격화되었으며 화포도 전면적으로 개조되어 성능이 향상되었다. 화포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화포군(火砲軍)이라는 새로운 병과(兵科)를 등장시켰으며, 그후 화차(火車)도 만들어졌다. 조선 초기의 전함으로 유명한 거북선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쳐서 격심했던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만든 것으로 고려의 돌격전함을 계승한 것이었다. 거북선은 15세기초에 건조되었는데, 16세기말의 임진왜란 때 큰 위력을 발휘했다.

한편 널리 알려진 것처럼 거북선이 철판으로 장갑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定說)이 없다. 이밖에도 조선 전기, 특히 세종대에는 건축기술이 발전해 한국 고유의 건축양식이 생겼으며, 인쇄술과 함께 종이제조 기술도 발달해 질이 좋은 종이가 생산되었다. 그리고 농업기술도 크게 발달했는데, 각 지방의 발전된 농업기술을 요약해서 출판한 〈농사직설 農事直說〉(1929)은 새로운 기술의 보급에 크게 기여했으며, 조선에서도 유기기술적 집약농업이 행해지게 되었다.

후기

조선 전기의 과학기술의 성과는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등의 대규모 전란으로 인해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위축되어 자주적인 과학기술 전통이 무너졌다.

이렇게 열악했던 조선의 과학기술이 영·정조시대에 이르러 재정비되었으나, 이미 조선의 과학기술은 청(淸)을 통해 들어온 서양과학의 영향에 압도되었다. 우리 선조들이 서양의 앞선 과학기술에 처음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에서 활약하고 있던 서양선교사들의 책과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1631년 명(明)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鄭斗源)과 청에 볼모로 잡혀 있다가 1644년에 귀국한 소현세자가 여러 가지 서양문물을 소개하면서 시작된 서양문물의 영향은 이후 많은 연행사(燕行使)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서양 과학기술의 영향은 주로 실학파들을 통해 나타났는데, 실학자들에게 본격적으로 나라의 부강을 위해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우자는 의식이 일어난 것은 18세기말부터였다. 그들은 우리의 본질적인 것을 지키기 위해 서양의 기술을 배우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대원군 이하응(李昰應)도 서양의 기술, 특히 기선과 무기기술을 배우고자 힘쓰기도 했다.

한강에서 서양기선을 수리해 움직이는 시험도 해보고, 수뢰포(水雷砲)를 만들어 발사실험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강경 쇄국정책으로 돌아서면서 그가 실시한 부분적인 서양기술의 자력 도입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개화기 이후

과학기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1876년의 조선 개국은 너무 늦게 일어났다.

서양의 제국주의가 팽창하던 시대에 개국을 행한 조선은 정치적 혼란을 거듭했고,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은 한층 높아갔지만 실제로 과학기술에 대한 실력은 조금도 쌓아갈 수 없었다. 1881년 신식기술을 훈련시켜 서울에 무기공장을 세우기 위해 김윤식(金允植)을 단장으로 해 톈진[天津]에 파견한 영선사행(領選使行)이나, 같은 해에 일본의 근대화한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파견된 신사유람단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서양의 앞선 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직접 근대과학기술을 수용하는 데는 실패했다.

1890년대 이후 전기가 들어오고, 전화가 가설되고, 전차가 서울 거리를 달렸으며, 근대식 공장이 문을 열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조선인의 기술 수준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한편 1890년대부터 새로 생겨나기 시작한 근대식 교육기관에서는 과학기술을 포함하는 서양의 학문을 가르쳤으며, 이와 함께 일부 해외유학생들을 통해 근대과학기술이 행해졌다. 이에 따라 초보적인 공장공업이 생겨나고 양잠·제지·인쇄·방직 분야의 기술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의 기술수준은 아직 미미한 상태에 불과했다. 그후 일제강점기를 통해 한국에서는 소비재생산을 위한 몇 가지 공장과 그밖에 일제의 전쟁수행을 위한 전력·비료 등의 공업시설이 있었을 뿐이다. 그나마 일정수준 이상의 기술을 갖춘 한국인기술자들은 거의 없었다.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과학기술의 측면에서 가장 가혹했던 것이다. 8·15해방 이후 한국의 기술수준은 보잘 것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교육받은 일부의 기술자들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과학기술이 성장한 것은 1959년 원자력원이 발족되면서부터였다.

원자력원은 1960년을 전후해 구미 선진국에 수많은 국비 유학생을 파견했으며, 국내의 이공계 대학졸업자들이 외국유학을 하고 돌아옴으로써 한국의 과학기술은 크게 발전했다. 또한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과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설립도 한국의 기술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성과로 한국의 기술은 급격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 한국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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